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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가족·행복

수필

기자로서 일하며 살며 느끼며

최고야님 2024. 7. 5. 16:38

지역 담당 기자. 
전에는 지방 주재 기자로 불린 기억이 있다.
갑작스레 무슨 말이냐면 지금 자의반 타의반 지역 담당 기자로 

경기 북부 지역에서 동분서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에 4대 중앙 일간지 기자로 사명감과 프라이드를 가지고 현장 중심으로 뛰었다.
인터넷이 등장하고 발전하면서 매체도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이에 비례해 기자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아졌다.
기자가 많으면 그만큼 뉴스와 정보도 많아진다. 그런데 기사가 리드(맨앞 문장)부터 엉망이다.

현대사회는 시간이 돈인 것처럼 바쁘다.

신문 볼 시간은 없고 휴대폰으로 뉴스 보는 것만도 다행이다.

그래서 기사 제목과 리드만 보고서도 어떤 뉴스 내용인지 알아야 한다.

실상은 제목을 봐도, 리드를 봐도 도대체 무슨 뉴스인지 핵심을 알 수 없다.

요즘 기자를 폄훼하는 지적이 아니라 기사를 제대로 쓴 것인지,

이를 바로 잡아야 할 부장(데스크)이 데스킹을 정확히 한 것인지 모를 정도로

리드가 중구난방이라 더 헷갈린다. 

직언하면 기사 작성 교육을 제대로 받은 기자인지 답답할 정도다.

문제는 이런 교육을 엄격하게 받는 수습 과정을 거치는 기자가 사실상 거의 없다는 것이다. 
'나 때는'을 얘기하면 꼰대 소리를 듣는  세태지만 당시 얘기를 안 할 수 없다.
언론고시로 불릴 만큼 쉽지 않은 관문을 넘어야 기자가 되는 과정이고, 
합격해서 기자가 되더라도 3~6개월  수습 교육을 받아야 그나마 인정받을 수 있다.
또 다른 변화는 보도자료의 등장이다. 어떤 연유로 어떤 과정에서 나온 지는 알 수 없으나 이로 인해 '현장'이 없어졌다.
현장에 나가야 기사를 쓸 수 있는데 보도자료 이후는 그저 앉아서 '옮기기'만 하면 기사가 됐다.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보도자료를 인용하면 기사 쓰기에는 편리해진 점은 있다. 하지만 기자라면 기사를 제대로 써야 한다는 교육, 그것도 좋은 말로 하면 스파르타 식 교육이고 나쁜 말로 하면 쌍 욕을 들으며 배우는 비인간적인 교육이다.
당시는 컴퓨터, 인터넷 없던 때이기에 기사를 원고지에 작성하고 교정교열을 거쳐 문선부에서 활판 납글자로 조판하고

동판 찍어서 윤전기에 돌려 신문을 인쇄하던 시절이니 지금과 비교하면 말 그대로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이다.
여하튼 그렇게 현장 기사 작성을 배운 수습 출신 기자와 어떻게 하다 보니 기자가 된 기자의 차이는 분명히 있다.
중앙에서는 그나마 수습 기자의 맥이 어느 정도 이어져 오고 있다. 

 

중앙일간지 기자 시절 모습. 지금은 손마다 휴대폰을 들고 있지만 당시만해도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라 모두 맨손이고 추억의 사진도 적다. 저 많은 사람 중에 얼굴 블러 처리 안 한 사람이 본인.

 

교육의 내용은 완전 인권적으로 바뀐 것 외에는 사스마와리(담당 구역 돌기) 등 나와바리(배당 구역)를 담당하는 절차는 계속되는 것 같다.
그런데 지역에 오니 막말로 말해 쥐나 개나 다 기자다. 수습 기자 공모 시험이나 교육 그런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저 지역에서는 학연, 인연, 출신 등으로 세를 형성한다. 
겉으로는 절대 그렇지 않다지만 사실상 권언유착, 끼리끼리, 텃세가 심하다. 중앙지 출신이면 되레 차별을 받는다.

중앙에서 지역지가 상대적으로 어렵듯이 지역에선 중앙지가 밀린다. 
중앙에서는 기업 거래처 관계로 유지되지만 지역에선 관공서가 주거래처가 된다. 이른바 먹고살기 위해 자연스레 유착되지 않을 수 없다. 지자체장 용비어천가가 남발되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지역 담당 기자 생활이 얼마 되지 않아 부정적인 면만 얘기한 것 같은데 1년여 생활에서 느낀, 솔직한 생각이다.
한국일보 입사 후 결혼 등 안정적인 생활을 이어가던 중 여름휴가에서 대형 교통사고로 인해 생사의 기로를 넘었다.

복직 후 불가피하게 계열사 서울경제로 전근하게 되고 이 때 불만족으로 신문사 이직의 '메뚜기 생활'이 시작됐다.

이후 세계일보, 경향신문, 아시아타임즈 등 메이저-마이너 언론에 이어 CNB뉴스 등 인터넷신문까지

가히 언론사 전체를 경험하게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수많은 언론사를 돌고 돌면서 중앙 생활에 회의를 느끼던 차에 통신사 지역취재본부의 본부장 자리를 맡게 됐다 
그렇게 본격적인 지역 담당 기자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지역 생활 초기에는 '몸은 지역에 있지만 생각은 중앙에 있다'는 지적을 적지 않게 받았다.
그럴 때마다 '당연하지, 중앙 생활이 40년인데'라며 스스로를 자부하고 지나쳤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그들의 지적을 깨닫게 되고 지금은 철저히 지역 담당 기자로 동화돼 활동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 길만이 역시나 사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직 마음 한 켠에는 '한국일보 49기 출신 기자'라는 사명과 자부심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런 인식이 지금 시대와는 맞지 않기에 모두라고 할 수는 없지만 '40년 기자' 경력이면 누리는 경제 형편과 맞지 않는

검소한 생활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직도 내집, 내땅, 내사무실이 없는...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적은 시점인데, 많은 사람이 공감했던 노래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의 가사가 생각난다.

그래도 언론권력의 힘을 내세운 불법, 부정과 비리 등에 엮여서 오명과 치욕의 생활을 하지 않은 것이 더 자랑스럽다.

대학 시절 감명 깊게 읽고 아직도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레오 버스카글리아의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처럼,

윤동주 시인의 '서시'처럼 살아 오고 살아 가는 삶이 기쁘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쉽게 느껴지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딱 이렇게 생을 마무리하고 싶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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