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 전통의 한국일보는 정정당당, 춘추필법, 불편부당의 자세로 한국 최고 정론지를 지향합니다'
한국일보의 정신이다.
그런데 한국일보를 떠나 중앙지를 돌다 근래 이른바 마이너 언론 생활을 한지도 어느덧 10년이 다 돼 간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있는데 현장에서는 '아직도 중앙지 기자 생각을 못버린다'는
지적 아닌 지적을 받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고향이 있다. 태어난 곳이지만 그곳을 떠나 타향살이를 한다고 해도
누구든 '고향에 대한 그리움(애향심)'은 인지상정처럼 가슴 한 켠에 늘 자리하고 있다.
그런 느낌일까. 한국일보를 자의반 타의반으로 떠나온 지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고향 같은 그리움과 애정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래서 언제나 난 한국일보 견습기자 49기라고 당당히 밝힌다.
지금은 없어진 한국일보 사옥이지만 서울시 종로구 중학동 14라는 주소는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취재수첩과 모나미볼펜이 전부인 취재방식, 현장에 가지 않으면 기사 한 줄도 쓰지 못하던 시절이다.
수첩에 흘겨쓴 취재 내용을 편집국에 들어와 200자 원고지로 옮겨써 데스크에 제출하고
이후 문선부에서 납으로 된 활자를 꼽아 신문 지면을 구성하고
구성된 활자에 먹물을 바르고 백지 지면을 눌러 찍혀나온 먹지면으로 교정, 교열을 보던
1990년대 당시의 편집국과 신문 제작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른바 MZ세대로 불리는 지금의 젊은이들은 드라마, 영화에서나 봄직한 모습일게다.
하지만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는 법. 지금의 난 한국일보 기자가 아닌 한국일보 출신 기자일 뿐이다.
그렇지만 기사 작성만큼은 자신 있다.
심한 말 한 마디에도 맞서는 선후배가 아닌 선배의 말 한마디면 '작아지는' 시대였기에
육두문자 욕설을 들으며 조인트 까지면서 쉬는 날 없이 배운 취재력이기 때문이다.
한국일보 재직 당시에는 인근에 서울경제신문과 일간스포츠, 소년한국일보가 함께 있었다.
한국일보에서 서울경제로 이동하는 계단 중앙에 당시 한국일보 장강재 회장의 휘호가 있었다.
"언론은 그 누구도 이용할 수 없다"
지금 돌이켜봐도 기자로서 살아오면서 가슴에 새겨진 지침이다.
인터넷언론이 일반화되고 의도적으로 언론을 이용하는 일부 매체를 보면서 격세지감을 느낀다.
그만큼 생존경쟁이 치열해졌다 해도 기자만큼은 영업직 샐러리맨화 되지 않기를 갈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