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이라는 가수 팀이 발표하는 곡마다 꾸준히 상위권에 오르는 등
대단한 인기가 있었다는 시기에 나는 대체 뭘하고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내가 무슨 일을 했길래 이렇게 유명한 가수나 노래를 알지 못했나 하는 생각에
시기를 돌이켜 더듬어 찾아보니 이해가 되는 시기였다.
이들은 거북이란 이름의 남1여2 3인조 혼성보컬팀으로 데뷔해
2001년 1집 앨범 'Go! Boogie!'를 발표하며 힙합 음악을 중심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이후 2011년 9월까지 10년을 활동했는데 공교롭게도 내가 매우 어려웠던 시기와 겹친다.
그래서 이들의 노래나 존재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힘겨운 10년 세월을 보냈다.
거북이가 활동을 시작한 2001년은 내게 있어 실직의 시간이었다.
1999년 12월 31일 당시 경향신문 기자로서 2000년 밀레니엄 시대를
반기며 환호하는 열광의 현장, 광화문에 있었다.
10, 9, 8, 7…3, 2, 1… 2000!!
그렇게 대망의 2000년대를 맞이하고 불과 1년만인 2001년 11월 말에
경향신문에서 해직됐다. 종교적 신념때문이었다.
막상 종교적 신념으로 표현하니 그것을 내세워 병역 의무를 거부한
여호와증인 관계자처럼 보이게 한 것 같다. 절대 아니다.
난 대한민국 남자로서 병역의 의무를 다하고 만기 전역했다.
종교적 신념은 사이비 종교가 아니라 교회를 가기 위해 회사를 포기한 것을 말한다.
당시 경향신문은 한화그룹에서 경영하면서 막대한 자금 소요로 힘들어 했다.
결국 한화는 경향신문을 포기하기로 결정하면서 임직원에게 퇴직금 등의 명목으로
적지 않은 자금을 제시했다.
하지만 임직원들은 그 자금을 경향신문 운영자금으로 사용하기로 뜻을 모으고
권력과 자본에 종속되지 않은 '독립언론'이란 기치를 세우고 독자경영에 나섰다.
뜻이 아무리 좋아도 현실은 시기적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경영난을 겪게 됐다.
이에 허리띠를 졸라매고 더욱 열심히 뛰자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일요일에도 일찍 출근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난 교회를 다니고 있었기에 예배로 인해 일찍 출근하기 어려웠다.
일찍 나간다고 해도 일요일이기에 딱히 할 일이 더 있지도 않았다.
그래서 예배를 보고 오후에 출근하니 회사 불만도 커져 갔다.
한 달여 지나면서 회사는 결국 담당 데스크(부장)를 통해 '최후통첩'을 했다
나로 인해 회사 분위기에 악영향을 주니 회사를 선택하든지
교회를 선택하든지 양자택일을 하라는 얘기였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교회를 택하겠다'면서 사직서를 내고 나왔다.
그 때가 2001년 11월이었다.
후에 들은 얘기지만 당시 경향신문 내에서는 내가 교회를 선택했기에
목사가 되기 위해 회사를 나갔다는 설(說)이 공공연했다고 한다 ㅎ
그렇지만 현실은 신문사를 나오고 나서 계절도 겨울로 접어들고
추운 날씨만큼이나 생활 어려움도 혹독해졌다.
이력서가 대학졸업 전부터 오직 신문사 기자 경력만으로 채워지니
회사 비리를 캐기 위해 위장취업을 하는 것으로 알고
어떤 사장도 채용을 꺼려했기 때문이다.
사실 대학교 시절부터 기자의 길을 선택해 대학신문인 학보사 활동도 하고
장학생을 대상으로 공모한 통일논문대회에서 대상 없는 우수상(사실상 대상)도
수상하는 등 글쓰기에 전념했다.
경제무역학 전공이었으나 부전공으로 신문방송학을 수강하는 등
적극적으로 '언론고시'를 준비했다.
당시는 3대 고시로 불리는 사법·행정·외무 고시에 더해 언론사 입사시험 준비가
3대 고시만큼 어렵다고 해서 언론고시로 불리었다.
어디라고 밝힐 수는 없지만 수차례 고배를 마신 끝에 대학 4학년 시절에
한국일보 견습기자 49기로 기자의 길에 본격적으로 발을 딛게 됐다.
당시 한국일보는 서울시 종로구 중학동 14번지로 광화문 인근에 자리해
청와대도 한 눈에 보이는 위치에 있었다.
한국일보와 서울경제·일간스포츠가 계열사(소년한국일보·코리아타임스도 있으나 별도 운용)로
건물 2개 동에 연결된 통로로 편집·조판·인쇄 등 상호 왕래가 가능했다.
한국일보 강강재 회장 별세 이후 동생들의 경영권 다툼인 '형제의 난'으로
서울경제·일간스포츠가 각각 분리되면서 침체의 늪으로 빠져 들었다.
한국일보는 오랜 고행의 길을 걷던 중 목재·화학산업과 미디어·중고차업체 등
계열사가 있는 동화그룹이 인수하면서 다시금 정상화의 길을 걷고 있다.
서울경제는 2000년에 한국일보 계열사에서 분리·독립한 후
케이블채널 서울경제TV(SEN)를 개국해 경제전문언론을 이어가고 있다.
한국일보는 경영권 사태이후 충무로·서대문 등지로 전전하다 현재 한국일보 터에
새로 건립된 건물로 재이전해 다시 '고향'에 둥지를 튼 셈이다.
일간스포츠는 중앙일보에서 인수·운영한 후 현재 KG그룹 계열사인
이데일리M에서 발행하고 있다.
지금은 이른바 조·중·동으로 불리며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동아일보가
중앙일간지의 우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당시(1990년대 초)에는
조·중·동에 한국일보를 포함해 4대 일간지로 불리웠다.
제작시스템도 지금은 컴퓨터 조판시스템인 CTS로 신문 지면 제작이 이뤄지지만
당시는 납활자를 제목과 본문에 배열해 먹물을 바른 후 고무롤러로 눌러
종이에 찍힌 내용을 보고 교정과 교열을 보는 수준이었다.
기자도 보도자료 같은 것은 상상도 못했던 시기로 기자수첩에 볼펜 하나 들고
무조건 현장에 나가 어떤 것이든 취재해 글로 작성해야만 기사 송고가 가능했다.
수습기자는 기본적으로 새벽에 담당 경찰서로 나가 사건·사고를 취재해야 했다.
이를 사스마와리라고 불렀다. 이는 경찰서 찰(察)의 일본어 '사스'에
마와루(돌다)의 명사형 마와리를 합쳐 경찰서를 돌면서 취재하는 것을 말한다.
언론·출판계는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아 현장에서도 야마(기사 본문 리드부분)
·사스마와리(경찰서 돌기)·나와바리(내 구역) 등의 일본어가 상당히 사용됐다.
옛 생활을 회상하니 글이 길어졌다. 다시 거북이로 돌아가자.
서두에 언급한 대로 인기가수 이름도 노래도 모르며 활동 시기를 지나쳐 왔는데
어느날 정말 우연히 거북이의 '빙고'라는 노래를 듣게 됐다. 충격적이었다.
터질 것만 같은 행복한 기분으로
틀에 박힌 관념 다 버리고 이제 또
맨 주먹 정신 다시 또 시작하면 나
이루리라 다 나 바라는대로
지금 내가 있는 이 땅이 너무 좋아
이민따위 생각 한 적도 없었고요
금 같은 시간 아끼고 또 아끼며 나
비상하리라 나 바라는대로
산 속에도 저 바다 속에도
이렇게 행복할 순 없을거야 랄랄랄라
구름타고 세상을 날아도
지금처럼 좋을 수는 없을거야 울랄랄라
모든게 마음 먹기 달렸어
어떤게 행복한 삶인가요
사는게 힘이 들다 하지만
쉽게만 살아가면 재미없어 빙고
거룩한 인생 고귀한 삶을 살며
북(부)끄럼 없는 투명한 마음으로
이내 삶이 끝날 그 마지막 순간에
나 웃어보리라 나 바라는대로
리듬감도 대단하지만 노래 가사가 가히 천재적이다.
3행시처럼 가사 앞부분에 멤버 이름인 터틀맨·지이·금비와 거북이 모두 들어가 있다.
그리고 가사 내용도 사랑 타령이 아니라 너무 건설적이다.
틀에 박힌 관념, 맨 주먹 정신, 금 같은 시간, 거룩한 인생, 고귀한 삶,
부끄럼 없는, 투명한 마음 등 명언 같으면서도 교훈적이다.
단박에 팬이 됐다. 거북이 노래·영상을 찾아 듣고 또 들었다.
"이 시대에 이런 천재적인 가수가 있었다니" 뒤늦게 알았지만 아쉬움만큼 만족감은 컸다.
그런 과정 중에 알게된 또 하나의 충격! 비보(悲報)를 접했다.
'거북이 활발한 활동을 이어 나가던 중 2008년 4월 2일에 팀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터틀맨(임성훈)이 자택에서 급성 심근경색으로 숨진 채 발견됐다. 터틀맨 사망 5개월 만인
9월 4일에 팀이 해체됐다'는 것이다.
참으로 안타깝다. 경쾌한 멜로디와 긍정적인 가사로 신바람을 일으킨 거북이 터틀맨.
그의 천재성으로 가요계에 새로운 획을 남기기는 했지만 더할 가능성이 많았는데
37세를 일기로 떠난 것은 아쉬움이 크다.
늦게나마 그의 명복을 빌며 씁쓸한 마음을 '빙고'로 달래면서
가사의 의미를 곱씹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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